BCG 예방주사는 영유아 기본 예방접종 중에서 B형 간염에 이어 두 번째로 접종하는 결핵 예방주사이다.
전염병은 면역기능이 약하고 영양상태가 낮은 사람에게서 더 잘 걸릴 뿐 아니라 중증으로 진행되는 질환으로 개인과 국가의 경제상황과 직결된다.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쉽게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나라를 잃은 36년에 이어 해방은 되었지만, 남북의 혼란, 6.25 전쟁과 전후 그리고 사회 혼란이 닥치면서 경제는 최빈국 상태로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되었다. 국민 건강은 바닥에서 헤 메일 수밖에 없었으며 전염병과 영양실조는 어린이들의 주된 사망원인이 되었다. 어떻게 보면 이 시대를 견뎌온 70대 이상의 장년층(?)은 구사일생의 기회였는지 모른다. 그 시절에 홍역, 콜레라, 장티푸스, 디프테리아, 기생충, 결핵은 건강을 위협하는 대표적인 질환들이었다. 홍역은 예방주사도 없었던 시절이어서 면역이 없는 영유아는 100% 걸렸으며, 살아남으면 내 자식이라고 생각해서 출생 후 1년이 지나도록 호적에 올리지도 않았다. 지금과는 다르게 상수도 시설이 미비하던 때, 수인성 전염병인 콜레라에 집단으로 감염되면 심한 설사와 구토, 복통으로 수분 부족과 전해질이상으로 사경을 헤 메였다. 계절 따라 발생한 장티푸스, 디프테리아는 7일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인명을 앗아갔다.
마을 인근에서 인분으로 재배해 판매하던 야채는 100% 기생충 알에 오염되어 있었으며 잘 씻어도 완벽할 수는 없었다. 1962년 인도네시아 아시안게임에 파견된 해외선수단의 93%가 기생충이 검출되어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그래서 국민학교운동장에 모여 구충약 ‘산토닌’을 단체로 복용하고 하굣길에 하늘을 보면 천지가 노란색으로 변했던 그 풍경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 외에도 겨울철이 되면 연탄가스(일산화탄소) 중독은 생명을 앗아가는 또 다른 복병이었으며, 추운 겨울날 ‘복어 알에 일가족 사망’이란 뉴스도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하였다. 그 후 기적처럼 국가발전이 거듭된 오늘날에는 이러한 문제는 과거의 오명으로만 남게 되었으며, 체격의 상승과 최단 기간 내 수명이 연장되어 100세 시대를 바라보게 되었다.
건강을 해치고 생명을 앗아간 수많은 질환들이 예방접종으로 예방할 수 있는 지금은 과거에 비해서 천국의 절반에 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나, 결핵은 아직도 우리나라 국민을 괴롭히는 후진국형 질환 중 하나이다. 6·25 전쟁 당시 국제 결핵회의에서 우리나라 인구의 6.5%인 130만 명이 결핵 환자이며 20세 이하 7.7%가 X-선 검사에서 결핵이라고 발표하였다. 결핵은 만성 소모성질환으로 신체는 뼈만 남을 정도로 쇠약 해져서 많은 생명을 앗아갔다. 특히 어린이들의 결핵으로 임파선결핵과 폐결핵을 넘어 신체의 심부로 침투해서 결핵수막염, 신장결핵, 골결핵, 속립결핵 등으로 사망했던 어린이들을 많이 경험했다. 어린이 건강이 국가 경제와 직결된다는 것을 실전에서 뼈아프게 경험한 시대를 살아오며 의사로 50년, 소아과 전문의로 45년을 질병의 현장을 지켜왔다. 그동안 국가가 결핵 퇴치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2010년 10만 명당 4.7명 사망에서 2020년 2.6명으로 45% 감소시켰지만, 2020년 OECD 회원국 중 발생률 1위, 사망률 3위의 오명이 이 질환의 심각성을 입증해 주고 있다. 국가건강검진을 통해서 적극적인 환자 진단과 치료 그리고 격리조치와 함께 어린이 BCG 예방접종은 필수적인 조치가 되었다.
BCG는 출생 4주 이내 신생아에게 접종을 하며 3개월이 지난 경우에는 투베르쿨린 결핵반응검사를 해서 음성인 경우에 접종한다. 무료인 피내용(Danish 균주)과 유료인 경피용(Tokyo 균주) 백신이 있다. 둘 다 약독화 생백신으로 주사부위에 화농이 발생하며, 부작용으로 인근 임파선에 결핵이 발생할 수 있다. 접종 후 방어율은 0~80%로 다양하나 중증 결핵으로 진행되는 것을 낮춘다.
필자가 인턴시절 일이었다. 경북대학교 병원은 지역에서 유일하게 격리병동이 있어서 중증 결핵환자가 입원할 수 있었다. 환자의 욕창을 소독해 주던 중, 옆의 환자(50대 남자)가 갑작스럽게 짧은 비명과 함께 숨을 쉬지 못하고 허둥대다가 입술이 푸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의 일로 호흡은 물론 심박동도 멈췄다. 6인 병실에는 환자 외 의사라고는 나 혼자 뿐이었다. 반사적으로 ‘응급’이라고 소리를 지른 다음, 심폐소생술로 ‘에피네프린’을 심장으로 바로 주입하고 심장 마사지와 함께 구강 대 구강 호흡술(mouth-to-mouth resuscitation)을 시작하였다. 한참 지났을까, 환자는 ‘푸르륵’ 하면서 각혈 덩어리 기침과 함께 제 호흡으로 돌아왔다. 땀이 흘러 눈 안으로 들어갔지만, 첫 소생술 성공으로 아직까지 그 때의 장면이 생생하다. 물론 이 병동을 담당할 때 미리 결핵약인 ‘아이나’를 예방적으로 복용하고 있었으므로 더 특별한 조치 없이도 감염이 되지 않았지만, 죽음에 직면한 환자를 마주해야 하는 의사라는 직업의 현실을 초년생부터 제대로 경험할 수 있었다. 군의관 시절 3년 동안 근무했던 후송병원에서의 직함은 소아과과장 외에 호흡기내과 과장, 외래진료과장의 직책을 동시에 맡아 1인 3역으로 장병과 군인가족을 돌봐왔다. 호흡기환자는 대부분이 폐결핵 의심 환자였으며 흉부 X-선 사진으로 질병 유무를 판단하고 호전되지 않으면 후송을 보내야만 했다. 외래진료과장의 역할은 국방 최전선 지역의 순회 진료로 장병들의 건강을 살폈고, 분단의 현장도 둘러볼 기회를 여러 번 가졌다. 그 공로로 국군의 날에 표창을 받았다.
출처 : 경북일보 - 굿데이 굿뉴스 http://www.kyongbuk.co.kr/news/articleView.html?idxno=2133569